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론 음모론 (문단 편집) === 북인 미화 === 광해군 재평가와 맞물린 경향이 크다. 물론 광해군은 세자 시절에 엄청난 공을 세웠고 누구보다도 백성들의 지지도 받았으며 총명했었다. 즉위 이후 초반기에는 어느정도 선정을 펼쳤었다. 그러나 후반기로 가면서 봉산옥사, 계축옥사, 신경희의 옥, 해주옥사, 폐모살제, 허균의 옥 등 여러 옥사를 일으켜서 여러 현신들이나 명신들[* 여기에는 [[광해군]]을 지지한 사람들도 많았다. 이원익, 이덕형, 이항복, 심희수, 이호민은 광해군을 지지했다. 정경세 역시 광해군을 지지했다. 게다가 선조의 고명을 받은 유교 7신 중에도 광해군의 즉위를 지지한 사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유영경, 한응인을 뺀 사람들은 다 광해군을 지지했다. 서성, 신흠, 허성, 한준겸, 박동량은 모두 광해군의 즉위를 지지해 줬다. 게다가 한응인도 나중에는 광해군 지지로 돌아섰다. 그런데 광해군은 자신을 도와준 이들도 배신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곽재우와 기자헌도 토사구팽을 했다.]을 죽이거나 유배를 보내고, 게다가 광해군의 측근들은 부패의 끝판왕이었는데, 방납비리 등을 많이 저질렀다. 광해군은 세자 시절과 즉위 초반기에는 그래도 나름 선정을 펼쳤었던 것은 맞지만, 계축옥사 이후에는 조정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더 나아가서 대북 일당독재를 만들었다. 게다가 광해군은 자기를 지지해 주던 백성들을 배신하는 행위도 저질렀는데 바로 무리한 궁궐 중축이었다.[* 사실 임진왜란때 궁궐들 대부분이 불에 타서 소실되었기 때문에 전후 복구를 위해서는 필요한 절차였지만, 너무 지나치게 작업을 하려고 시도한게 오히려 문제였다.] 백성들을 궁궐 중축에 무리하게 동원하고 경운궁, 창덕궁, 창경궁 등으로 모자라서 마구 궁궐을 지어댔고, 거기서 모자라서 궁궐 건축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조도사들을 동원한 건 물론, 조도사들의 수탈을 지원했다. 그리고 미신과 풍수에 빠지기도 했다. 명청교체기의 외교에서 광해군이 인조보다 뛰어났다는 전제 자체가 기성 연구자들의 만주어 학습에 대한 무관심으로 청쪽 기록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방대한 분량의 승정원 일기를 손쉽게 검색할 수 있게된 것이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역사의 연속성을 감안하지 않고 왕의 증언조차 비틀어 놓은 실록의 부분적인 기록만 참고한 단편적인 시선에 불과하다. 이이첨 등의 북인은 대명사대에서 크게 다를 바 없어서 광해군의 외교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항복의 제자인 정충신이나 같은 서인이던 장만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들의 경우에는 반정을 주도한 공서파가 오히려 주화파로써 광해군의 중립외교 같은 것을 주장했고, 척화를 주장한 서인들은 반정공신들을 비판하고 반정공신들의 전횡을 비판한 재야 서인들이었는데, 즉 청서파가 척화파의 다수였다. 이렇게 지나치게 정적들을 제거하는 등 너무 설쳐댄 탓에 북인들은 [[인조반정]]으로 대거 숙청당하여 멸망하고 그 일부는 남인들에게 흡수당하는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